목회자는 사역하는 교회에서 사례금을 받는다.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고전9:4-11절). 그러나 일부 목회자들은 공동의회에서 정해진 사례금, 도서비와 판공비 이외 사례를 별도로 얻는다. 예컨대 교인 심방에 대한 수고비, 개인적으로 전해지는 사례금 그리고 다른 교회의 집회나 세미나 초청에 따른 강사비 등이다. 정당한 듯 보이지만 이것들은 목회자의 경건을 갉아먹는 좀벌레 같다.
대형 교회라면 목회자들에게 신자들을 방문하는 일은 아주 잦다. 신자들은 심방하는 목회자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사례금을 건넨다. 한국의 정(情) 문화 때문이다. 보통 사례금은 10만원 이상이다. 하루 세 곳을 심방한다면 30만원 이상의 과외 수입이 생긴다. 한달 동안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의 사례금을 별도로 얻을 수 있다.
40년 전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의 부교역자가 2-3년 후 집 두 체를 샀다고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번영신학의 추악한 면이다. 이 당시 신자였지만 그런 간증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는가? 혹 하나님의 저주는 아닌지? 그는 경건 훈련에 실패했다. 목회자들이 심방 사례금이나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사례금을 일절 거부한다고 교회는 공개적으로 광고해야 한다. 하고 싶다면 교회로 헌금하라고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공개적 광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처음 목회자들은 심방 사례금에 무관심하지만 관례가 되면 문제가 된다.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사례금을 염두에 둔 심방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목회자는 잘 사는 신자의 심방을 더 선호하고 가난한 교인의 심방에 소홀해진다. 의식적으로 목회자가 빈부귀천으로 신자들을 판단한다. 그리고 사례를 준 신자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며 설교도 힘을 잃는다. 이런 잘못된 목회는 교회에서 불가하다. 개인적인 사례는 일체 거절해야 한다. 사례를 받고 나면 나중 뭔가 그에게 필요한 충고나 권면을 말해 주고 싶어도 쉽지 않다. 이미 그의 돈으로 목회가 묶인다.
유명한 목회자와 부흥사는 다른 교회의 집회나 세미나에 자주 초청 받는다. 유명도에 따라 강사비가 정해진다. 유명한 부흥사의 경우 집회 기간 동안 드려진 전체 헌금의 절반을 강사료로 받는다고 한다. 절간의 중이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두듯 부흥사도 집회보다 사례금에 더 관심을 둔다. 헌금 액수가 그의 영적 능력을 증명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집회마다 자기를 위해 헌금을 강요할 목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또는 탐욕적으로 인용한다. 말씀의 진리가 전해질 수 없다.
이런 류의 부흥사는 담임 교회의 양들을 돌보는 일보다 다른 교회의 초청에 더 관심을 두며 무척 노력한다. 집회에서 받는 사례금은 담임 교회의 사례금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무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 초청을 선호하는 이유는 주의 일 때문이 아니라 탐욕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담임 교회의 사역을 게을리 한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 목회자의 모습인가?
그리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목회자의 경우 서구 교회의 집회에 초청을 받는다. 강사료는 몇만 불에서 십만 불 단위로 늘어난다. 유명한 목회자라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서서히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집회나 세미나가 많다면 얼마든지 해외에 외화를 적립시켜 부동산도 별도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목회자가 유명한 인사들처럼 고액의 강사료를 과연 받아야 하는가?
경건한 목회자라면 이의 영적/윤리적 위험성과 파괴력을 잘 안다. 그는 수고비나 사례금을 완강히 사절한다. 불가피하게 받을 경우 선행을 위해 몰래 사용한다. 그러나 이에도 여전히 위험성은 도사린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과외로 받는 사례금을 교회에서 별도로 관리한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물론 그는 선한 일에 특별히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돈 많은 CEO나 인심 좋은 부자처럼 목회자가 이리저리 자기 마음대로 모아둔 강사료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주님이 아닌 자신을 알리기 위함이다. 강사료는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란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주의 종이다. 주의 종이라는 신분 덕분에 얻은 사례금이다. 이런 헌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런 헌금도 교회에서 공개적인 의논을 통해 사용되어야 한다.
아무리 경건한 목회자라도 시간이 지나면 쌓인 돈으로 인해 유혹을 받으며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큰 교회의 목회자가 비밀 장부가 있어 별도의 자금을 관리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이다. 이것이 과연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할 목회자의 자세인가?
이런 유혹을 피하려면 목회자는 애초부터 정해진 사례금 이외 수고비나 강사료와 관련된 돈에 무관심해야 한다. 선한 목적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돈을 별도로 관리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제직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 자신의 경건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좋다.
불가피하게 사례금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가난한 교회가 초청한다면 받은 강사료를 되돌려 헌금하라! 큰 교회라면 어려운 신자들을 돕는 기금으로 또는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으로 희사하라! 이것도 마땅치 않다면 양노원이나 고아원에 희사하도록 교회에 부탁하라! 한두 번 사례금을 받다 보면 불필요한 유혹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집회와 강의를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다. 이 때 초청 교회의 형편을 살피며 여행 경비를 교회로부터 받은 판공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초청 교회의 도움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라! 물론 가능하다면 판공비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 여기에 성경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목회 원칙이다(마10:8절). 둘째 이렇게 목회자도 자신을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 있다(마6:19-21절). 셋째 이렇게 목회자도 예수님이 말한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할 수 있다. 넷째 목회자들 사이 상식적 그리고 건전한 목회 방식이 전파된다.
이것이 돈과 관련된 목회자의 경건 삶이 아닌가? 요즘 사회에서도 재능 기부를 말한다. 가진 재능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해 자신의 경비를 드리며 봉사한다. 교회와 목회자도 이 정도 선행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선행은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성경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하다. 자랑거리가 전혀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건 삶은 자기부정을 요구한다. 신앙 삶 자체가 자기부정의 과정이라면 이를 실천한다면 경건을 몸소 실천하는 셈이다. 당연히 목회자는 이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담임 교회에서 받는 사례금으로 만족하라! 사례금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준에서 정해져야 한다. 사례금에 지나치게 욕심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목회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