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아펜젤러의 제물포 입항 경위와 그 역사적 의의

안명애 2015. 7. 15. 07:16

1.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이여!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에 나오는 후렴구입니다. 아름다운 계절 4월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T. S. 엘리옷(Eliot, 1888-1965)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회를 위해서 4월은 축복의 계절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 한국 최초의 공식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부부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 1859-1916)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역사적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 후 한국은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져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고루한 전통과 높은 문맹률, 고질적인 인습에 갇혀 살던 우리 민족을 위해서 학교와 병원과 각종 선진 문화 시설들이 차례로 설립되었습니다. 개화기(開化期)가 활짝 꽃피우게 된 것이지요!

        흔히 근대화를 서구화라고 말합니다. 서구화의 한 가운데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초석을 다지는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제물포 입항을 기념하고 그 숭고한 선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본 강연에서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고자 합니다. 첫째, 아펜젤러 내외의 제물포 입항이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둘째, 아펜젤러가 인천항에 들어온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내한하기 약 6개월 전인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 安連, 1858-1932)이 한국에 미리 와서 체류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미국 공관의 공관의요 고종황제의 어의로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활약했을 뿐입니다. 공식적인 선교사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알렌은 나중에 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된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근대병원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해서 한국 선교의 거점을 마련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123년 전 4월 5일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아펜젤러 부부뿐만 아니라 언더우드,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스쿠더(Scudder)와 테일러(Taylor), 고종황제의 독일 고문 묄렌도르프 등 모두 6명이었습니다. 묄렌도르프는 차치하고서라도 스쿠더와 테일러는 회중교회 목사들로서 한국을 시찰하기 위하여 일시 방문했으므로 역사적인 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만이 한국 선교라는 분명한 목적과 비전을 품고 내항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주관심사로 삼았습니다. 더욱이 오늘 이 자리가 주로 감리교인들이 모인 자리일 뿐 아니라 강연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제외하고 아펜젤러의 내항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만을 집중적으로 짚어 보고자합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역시 아펜젤러 못지않게 한국 선교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아펜젤러의 인천 상륙작전
        그렇다면 아펜젤러의 최초 인천 상륙작전은 어떤 모양으로 전개되었을까요? 한국의 감리교 선교에 대한 계획은 민영익을 비롯한 방미 사절단 일행이 1883년 감리교 목사 존 가우처(John F. Goucher, 1845-1922)를 우연히 만난 것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가우처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파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즉시 2천 달러를 선교 기금으로서 희사했습니다. 가우처의 물심양면의 지원에 힘입어 미 감리교 총회 선교 위원회는 일본 주재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 박사에게 한국 답사를 훈령했습니다. 1884년 6월 23일 매클레이 부처는 제물포 항에 도착하여 그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 일본에서 알게 된 개화파 김옥균(1851-1894)을 통하여 고종 임금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고종은 교육과 의료 두 가지에 대해서만 윤허(允許)를 내렸습니다. 일단 간접선교만 허락했던 것이지요. 일본으로 돌아온 매클레이는 이미 전에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적이 있는 이수정(1842-1886)에게 감리교 교리문답서를 한글로 번역해 줄 것을 의뢰하는 등,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한편, 매클레이로부터 조선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에 착수할 수 있다는 낭보를 들은 미 감리교 선교부는 파송할 선교사를 물색한 가운데 세 사람의 유능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선교사는 예일대와 뉴욕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로서 1884년 12월 4일 뉴욕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施蘭敦, 1856-1922)이었습니다. 그 다음 1885년 2월 2일 드류 신학대학 출신의 아펜젤러가 두 번째 한국 선교사로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스크랜턴, 아펜젤러와 더불어 특히 여성들을 위한 교육 선교의 적임자로서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어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施蘭敦 大夫人, 1832-1909)이 1884년 10월 임명되었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후일 배재학당과 더불어 감리교 여성교육의 요람이었던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던 분입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들인 스크랜턴 부부, 스크랜턴의 어머니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2월 3일 미국의 태평양 우편선인 아라빅(Arabic) 호를 타고 조선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습니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15일 주일 선상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橫濱)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 즉시 이들은 한국선교의 책임자였던 매클레이를 만나서 조선선교에 대한 세밀한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이들의 제물포 상륙작전은 매우 주도면밀했습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상륙할 경우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의혹을 살 수 있으므로 분산해서 들어가기로 합의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 선교의 부책임자로서 임명된 아펜젤러 부부가 선발대로 들어가고 스크랜턴 가족은 당분간 일본에 더 머물러 있기로 했습니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3월 23일 요꼬하마항에서 미쓰비시(三菱) 선박회사의 증기선 나고야마루(名古屋丸)호를 타고 대망했던 조선입국을 감행했습니다.  

        3월 25일 혹은 26일 나고야마루가 고베(神戶)에 정박했을 때 언더우드가 승선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와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의 역사적인 해후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 때 조선에서의 선교 가능성을 잠시 탐색하고자 했던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스쿠더와 테일러도 동승했습니다. 3월 28일 나가사키(長岐)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사흘 동안 이곳에 머무른 뒤 31일 세이리오마루(淸凉丸)호로 배를 바꿔 타고 다시 출항하여 도중에 일본의 작은 섬 두 곳에 들렀다가 4월 1일 밤 12시 30분 부산항에 닻을 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천항에 내리기 전 부산에 첫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한 밤중에 내려 1박하고 그 이튿날 잠시 관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에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괄목할만한 선교적 시도를 연속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선교의 발상지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부산과 달리 인천의 경우 아펜젤러가 내항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선교적 관심과 열정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선교적 시발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1박한 이튿날, 즉 4월 2일 오전 9시 아펜젤러 일행은 부산의 뭍에 올라가 난생 처음 조선의 풍광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등 부산관광을 한 뒤 조선입국의 둘째 날밤도 부산항의 선상에서 보냈습니다. 난생 처음 밟은 조선 땅 부산에 대한 소감을 적은 기록을 보면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냇가의 돌 위에서 방망이로 옷을 두들기며 빨래하던 여자들이 아펜젤러 일행을 보았을 때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선이 과연 은둔의 나라라는 사실을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이틀간의 부산 체류를 마친 아펜젤러 일행은 4월 3일 부산을 떠나 제물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날씨는 춥고 비가 내렸으며 배의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 뱃멀미로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아펜젤러가 탄 배는 1885년 4월 5일 그토록 숙망했던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던 부활절 오후 3시였습니다. 그 때 구름이 잔뜩 낀 제물포 하늘은 음산한 비를 뿌리고 있는 가운데 승객들이 안전하게 하선하도록 돕는 삼판선(三板船) 거룻배로 갈아타고 1시간 만에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바윗돌로 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렸습니다. 아무도 환영하는 이들이 없는 가운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역사적인 제물포 상륙은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가운데 너무나 쓸쓸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7세의 새신랑 아펜젤러 부처와 26세의 총각 언더우드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먼저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내디뎠을까요? 물론 몇 초 사이 간발의 차이이기는 하겠지만 감리교와 장로교의 자존심이 걸린 한 판 싸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교 선교사인 곽안전(Allen Clark 郭安全, 1908-?)은 그가 쓴 「한국교회사」(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가 피선교지의 땅에 첫 발을 디딘다는 일은 가장 엄숙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그래서 세 사람은 손을 잡고 동시에 뛰어내리니 셋이 다 그 영광의 첫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의 사람들도 장로교와 감리교 중의 어느 것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고 논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장로교 선교사의 이러한 추측과 달리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그의 아내 엘라(Ella)가 제일 먼저 은둔의 나라의 땅을 밟았다고 자랑스레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물론 농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선교사는 아펜젤러 일행 이전에 알렌과 매클레이 등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펜젤러가 먼저냐 언더우드가 먼저냐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논쟁일 뿐입니다. 더욱이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항에 곧바로 내린 것이 아니라 삼판선으로 갈아탄 채 내렸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세요. 아마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 세이리오마루호에서 내려 삼판선을 갈아탔을 때 아펜젤러 내외, 언더우드, 스쿠더, 테일러가 함께 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레이디 퍼스트라는 미국의 관행으로 볼 때 아펜젤러의 부인이 제일 먼저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이러한 사실을 그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아펜젤러나 부인은 공히 삼판선에 옮겨 탈 때 짐도 함께 실었다고 언급한 것을 놓고 볼 때 세 사람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동승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둘째,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같은 삼판선을 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 스쿠더와 테일러는 다른 삼판선을 탔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펜젤러가 언더우드와 같은 삼판선에 승선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셋째, 아펜젤러 부처가 같은 삼판선을 탔고, 세 사람의 싱글들, 즉 언더우드와 스쿠더, 테일러가 같은 삼판선을 탔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추측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펜젤러와 부인이 탄 삼판선이 아마 제일 먼저 육지에 도착했을 것 같고 연이어 언더우드와 스쿠더, 테일러가 탄 삼판선이 도착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펜젤러가 자기 아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고 기록한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가정이요 추측일 뿐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펜젤러의 감리교가 인천에 먼저 상륙했느냐 아니면 언더우드의 장로교가 먼저냐 하는 질문은 말 그대로 치기어린 논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펜젤러 일행이 제물포항에 상륙하자마자 이내 한중일(韓中日) 잡역부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으며 항구 근처에 있던 초라한 호텔('다이부쯔/大佛 호텔' 혹은 'Harry's Hotel'?)로 안내되었습니다. 호텔 안에는 단 하나의 세면대만 설치되어 있어서 모든 손님들이 함께 사용해야 할 만큼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단신으로 왔던 언더우드와 또 다른 두 미국인들은 근처의 호텔에서 잠시 여독을 푼 뒤 당일 저녁에 입경을 감행해 고종의 어의 겸 주한 미국공사로 있으며 광혜원을 운영하던 알렌의 집에서 한국에서의 첫 날밤을 보냈던 것에 반하여 아펜젤러의 부부의 사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임신한 부인을 대동하고 왔던 아펜젤러는 홀몸의 언더우드와 달리 곧바로 입경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 분위기가 험악해서 부녀자가 들어가기에는 매우 위험하다는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주한 미국 대리 공사로 있었던 폴크(G. C. Foulk 福久)가 볼 때 아펜젤러 부부는 서울에 머무를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미국과 조선 조정과의 외교관계로 볼 때에도 불청객에 불과했기에 인천 개항장 근처에서 한 1주일 정도 머무르다가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펜젤러 부부가 입경에 실패해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가지고 온 짐은 인천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펜젤러가 비록 몸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수화물은 제물포항에 놔두었다는 사실을 한국 감리교 선교의 시작으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1885년 8월에 아펜젤러가 일본에 있던 매클레이에게 쓴 편지를 보면 “바로 이 때[즉 1차 입경에 실패해서 일본으로 되돌아갔을 때] 우리가 우리 짐의 일부를 뒤에 남겨놓았을 바로 그 때에 감리교회가 한국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The Methodist Church, however, may rightfully be said to have entered Korea at this time, as we left a part of goods behind.) 이와 같이 적어도 선교의 발상지로서의 인천의 위상과 관련해서 아펜젤러는 이다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인천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입경했던 언더우드나 스크랜턴 등의 선교사와는 아펜젤러가 인천과 맺은 관계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말이지요!

        아펜젤러가 서울 입성에 실패해서 분루를 삼키는 동안 일본에 대기 중이던 스크랜턴은 아내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5월 3일 제물포로 들어왔습니다. 스크랜턴 역시 곧바로 입경하지 못하고 약 20여일 제물포에 체류하다가 서울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알렌의 광혜원 일을 도와주다가 자기 집을 사서 1885년 가을에 사립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서울 선교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아펜젤러보다 서울에 먼저 들어가 의료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감리교 선교의 발판을 구축했던 사람은 스크랜턴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일본으로 되돌아갔던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턴의 부인과 어머니를 대동하고 1885년 6월 20일 제물포에 재입항했으나 이번에도 입경 자체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스크랜턴 가족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반하여 아펜젤러 부부는 초가집을 세내어 처음보다 훨씬 더 긴 38일 정도를 내리교회 주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알렌이 아펜젤러 부부를 자기 집에 함께 지내자고 초대했지만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의 생각으로 한 집에 여러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 자기 내외는 겨우 지붕이나 차지하고 말 것이라며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매일 2달러를 지불하며 해리스 호텔에서 여장을 풀다가 서울에 좀 더 넉넉한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지낼, 아주 낡은 진흙 초가집을 한 달에 25달러를 주고 세냈습니다. 이 언덕 위의 집은 내부가 널빤지로 잇대서 만들어졌으나 외부에는 회반죽도 바르지 않은 매우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다 쪽으로 큰 창문이 나 있어서 때때로 불어오는 해풍이 상쾌했습니다. 이 오두막집은 그런 대로 지낼만한 했으나 7월 15일부터 시작된 장마철이 문제였습니다. 엘라가 1885년 7월 18일 숙모인 사라(Sarah)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이 때 그릇이라는 그릇은 모조리 동원해서 빗물을 받았지만 빗물이 새지 않는 공간이 거의 없을 만큼 많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 부처가 두 번째로 제물포에 체류하는 동안 중일간(中日間)의 긴장 상황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만사는 평온한 듯 보였습니다. 더욱이 이전의 소문과는 달리 외국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혐오감도 사라진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물포 사람들의 좋은 인상과는 달리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체감했습니다. "우리는 조선이 추수 때가 되어서 희어졌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반대로 조선은 기독교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아펜젤러는 특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던 중 1885년 7월 7일 주목할 만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증기선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수화물이 도착한 가운데 오르간을 풀어 한국 최초의 오르간 연주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는 친구인 리찌 이글리(Lizzie Yeagley)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르간이 방금 도착했는데 다 괜찮아. 좋아. 약 1시간 전에 해리[아펜젤러]가 ‘만복 근원 주 하나님’이라는 찬송, 등등을 연주해서 봉헌했단다. 한국 상공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었지. 한국의 모든 땅이 어서 빨리 이 찬송을 들었으면 해."

        이밖에도 아펜젤러 내외는 제물포 체류 기간 동안 가히 선교활동에 버금갈 정도의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습니다. 먼저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한국 선교 전반에 대한 비전을 구상했습니다. 날이 좋을 때에는 제물포 언덕배기로 걸어 나가서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족속들입니다. 신장이나 외모가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뛰어나고 태도에 위엄이 있으며 걸음이 씩씩하며 매너는 진지하나 습관은 불결합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조선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아펜젤러 부부는 "한국인들도 자기들과 마찬가지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포 체류 기간 동안 아펜젤러 부부는 양반들이 상민들과 여성들을 착취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펜젤러 부처는 스크랜턴이 서울 정동에 적당한 집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마침내 7월 29일 제물포를 출발해서 당일 해가 질 무렵에 서울에 안착했습니다.

        아마 아펜젤러의 제 2차 제물포 체류 기간 동안에는 위에서 서술한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비록 이 기간이 입경을 기다리는 '준비와 모색의 기간'이었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직간접적인 선교 사역이 이루어졌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비록 아펜젤러가 숙망했던 궁극적 목적지가 서울 정동이었기에 제물포에 학교나 교회를 세우는 등의 직접적인 선교활동은 착수하지 않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제물포 체류 기간을 선교활동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약 45일 동안의 최초 제물포 체류가 내리의 기원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인천에서부터 명시적이고 제도적인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한국 선교는 빨리는 1885년 4월 5일 최초 제물포에 상륙했을 때부터, 늦게는 6월 20일 제물포에 재상륙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빨리는 1885년 4월 5일부터, 늦게는 6월 20일부터 뿌려진 제물포 선교의 씨앗이 장차 내리교회라는 제도적 교회로서 자라나게 된 모태라고 믿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천하고도 중구가 한국 선교의 발상지라고 주장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아펜젤러의 제물포 입항의 역사적 의의
        아펜젤러 일행이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것은 세 가지 역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첫째, 민중 계몽운동이 파죽지세로 일어났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대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워서 직접적인 선교를 하기 전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서 이른바 '개화'(開化)라는 사회적 변혁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습니다. 특히 자기 이름을 갖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나있던 여성들을 계몽시키고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 한국인 특유의 영성에 기독교 복음을 접목시켜 수많은 선각자들을 길러냈으며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교회성장을 불러왔습니다. 이들 기독교 지도자들은 나중에 봉건주의에 젖어있던 사회를 개혁하는 주역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간 세력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또한 급성장한 한국 교회는 숱한 부작용과 내홍을 겪어오면서도 세계 선교에 눈부신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제물포 입항으로부터 촉발된 것임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셋째, 오늘 제물포 선교문화축제가 벌어지는 인천하고도 중구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인천 중구는 한국 선교의 발상지로서 민족의 성지입니다. 왜냐하면 아펜젤러 일행이 제물포항에 도착한 이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인천의 중구에서부터 유입된 복음이 조선 팔도로 유통되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제도적이고 명시적인 교회가 인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은 현재로서는 극히 미약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모체, 즉 그 씨앗이 인천에서부터 뿌려지기 시작했다는 근거는 확실합니다. 복음의 씨앗이 적어도 인천 중구에서부터 뿌려지기 시작했다면 향후 그 어떤 열매로서의 교회도 그 씨앗과 뿌리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19세기 말 인천이 서울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항도(港都)에 불과했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문명개화가 인천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면 인천이야말로 문명개화의 모체도시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선박이 해외여행의 주요 수단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국제공항이 영종도에 들어선 후 항공시대에도 인천, 그리고 중구는 여전히 국제적인 관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입항한 후 1885년 4월 9일 미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서신 보고서 말미에 나온 기도문을 읽음으로써 본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닿았습니다. 그 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빛과 자유로 인도해 주소서."(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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