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항상 위력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부의 사람들만 받아들인다. 이 모두 하나님이 시기와 때를 정해 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 수가 차기까지 날마다 확실하게 성장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았을까? 그가 아무리 외쳐도 동족이 듣지 않을 것을 그는 이미 알았다. 유대가 망하기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외쳐야 했다.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당시의 남은자가 절망의 메시지를 극복하고 소망의 메시지를 붙잡아 살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리고 앞으로 악인에게 행해질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함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남은자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은혜로 남은자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사역이다. 이사야의 사역은 동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 열심히 예언하는 것이었다. 이사야가 예언한 후 약 200년 지나 남방 유다가 망했다. 생전에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지 못했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열심히 사명을 수행했다.
이 점에서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사야와 결코 다르지 않다. 누가 남은자인지 그리고 언제 주님이 재림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설교에 신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닌가? 이것은 금지 사항이다. 그보다 메시지 내용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해 충고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절) 오늘날처럼 바울 당시도 말씀은 대단히 혼잡했다. 순전함으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첫째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둘째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설교는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해야 한다. 속이란 뜻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알아내 전하라는 것이다. 즉 자기 생각, 사상, 철학, 의견, 주장과 느낌을 전하지 말란 것이다. 영웅적, 감동적, 흥미로운 그리고 유머러스 한 이야기도 전하지 말란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란 것이다.
설교는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사도 바울이 주장한다. 충격적 사실이다. 흔히 사람 앞에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함을 말한다면 후자는 설교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해 언급한다. 목회자는 면전의식을 갖고 진실함, 성실함과 열정으로 설교에 임해야 한다. 하나님은 설교하는 자의 동기를 훤히 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설교의 주제와 핵심은 항상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뜻은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이 주제와 핵심에서 벗어난 설교는 강의나 강연이다. 교회의 강대상에서 이런 류의 강의와 강연은 너무나 많다. 사도 바울은 이 모두 설교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신구약 성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눅24:25-27절). 기록 방식대로 설교하란 뜻이다.
왜 이렇게 목회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구속사는 말씀에 근거하여 진행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 사역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할 것인가 여부는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달린다. 겉으론 성사역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너무나 다를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지금 이곳에서 계속 진행된다는 굳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 때 말씀에 근거를 둔 목회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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